동국대 총동창회
 
 
 
권노갑 전 총동창회장 인터뷰
  • 최고관리자 | 2022.01.13 14:06 | 조회 1901

     일류 교수 모셔야 명문투자 아끼지 말아야


    “DJ 분신으로 살아온 반세기가 가장 큰 영광

    총동창회는 화해와 통합의 정신 살리길




    92. 아무리 보아도 60대 후반쯤으로나 보이는데 1930년생이라고 하신다. 건강미 넘치는 잘생긴 얼굴이 맑다. 무려 두시간 동안 진행되는 인터뷰에 한 점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게 의자에 앉아 묻는 질문에 물흐르듯 답한다.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다.

     

    설명이 길어졌지만 바로 권노갑 전 총동창회장(경제과 49학번)의 캐릭터다. 그를 흔히 영원한 김대중 대통령 비서실장이자 경호실장’, ‘동교동계의 맏형’, ‘DJ기념사업회이사장등으로 부른다. 특히 상임고문을 많이 지내 ‘6선 상임고문이란 말도 회자된다.

     

    어쨌든 호칭할 명칭이 하도 많아서 무슨 직함으로 불리기를 원하시느냐고 묻자 널리 알려진 권 고문이 아니라 김대중기념사업회이사장’, 또는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 명예이사장으로 불러주기를 바란다. DJ와 일생을 함께 한 세월을 훈장으로 받아들이는 상징이자 단면이다. DJ의 분신으로 50년 넘게 그를 보좌했기 때문에 동교동계의 좌장으로 불린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원하는 대로 직함을 이사장으로 호칭하기로 했다.

     

    모교 총장실에서 이루어진 인터뷰에는 박대신 총동창회장, 윤성이 모교 총장, 김애주 대외협력처장, 신관호 총동창회 편집주간이 동석했다. 그에 대한 예우가 깍듯하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요즘 근황은 어떻습니까.

    아내가 예쁜 치매에 걸렸습니다. 평생 고생시켰으니 이제는 내가 뒷바라지해야지요.”

    필자는 처음 그 얘기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그냥 스쳐지나갔다. 나중 가족 얘기가 나왔을 때 부인 박현숙(85) 여사 얘기를 하던 중 예쁜 치매에 관한 얘기가 덧붙여졌다.

     

    반세기 동안 험한 야당의 길을 걸어온 나를 위해 뒷바라지해온 아내가 치매에 걸렸습니다. ‘예쁜 치매라고 표현했는데, 그동안 민주화 투쟁으로 감옥 가고, 수배를 당하고, 그럴 때마다 나의 뒷바라지를 묵묵히 해낸 아내입니다. 가장 아닌 가장으로 자식들 키우고 살림하느라 나보다 백배는 더 고생했지요. 아내가 나를 위해 희생한 대가가 이것인가 하여 한때는 괴로웠습니다만, 대신 그동안 아내에게 진 빚을 갚기로 했습니다. 나를 위해 헌신해온 것에 비하면 뒷바라지가 그 10분의 1도 안되지만, 이렇게 아내 곁에서 간병하며 화장실에서 뒷바라지 해주는 생활이 행복합니다.”

     

    부인 박 여사는 경기여고, 이화여대, 그리고 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FIT) in New York 출신에 아버지가 삼영인쇄주식회사를 경영하던 서울 명문가 출신이다. 박 여사의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지만 장인이 잘 봐주어서 결혼했는데, 평생 고생만 시켰다.

     

    이렇게 해서 자연스럽게 정치 이야기로 이어졌으나, 모교 재학시절 얘기부터 전달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아 권 이사장의 대학 다니던 시절을 물었다.

     

    -모교를을 진학하게 된 동기를 말씀해주십시오.

    부모님이 독실한 불자입니다. 내 이름을 스님이 지어주셨어요. 고향인 목포 시내 사찰 경내에 있는 룸비니유치원을 다녔으니 뼛속까지 불교 집안이었습니다. 그래서 목포상업학교(당시 6년제)를 졸업하면서 취직보다 대학 진학 계획을 세웠는데 동국대학 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었어요.”

    그는 1949년 동국대 경제과에 입학했다. 당시 캠퍼스는 혜화동과 필동에 분산돼 있었다. 경제과를 지망한 것은 상업학교 출신이어서 자연스럽게 지망한 것인데, 영어를 잘해서 외교관이 될 계획으로 영문과를 복수 전공했다. 경제과 수업은 혜화동 캠퍼스에서, 영어 수업은 필동 캠퍼스에서 들었다. 영어를 잘한 인연으로 6.25가 터졌을 때, 부산 미군기지사령부에서 미군 간부 통역관으로 3년여 근무했고, 나중 목포여고에서 영어교사로 2년여 근무했다.

    “6.25때 동국대학이 서울대, ·고대와 마찬가지로 부산에 내려와 있었지요. 복학할 수 있었는데, 미군 통역 일이 바쁘고, 돈 버는 것이 좋아서 복학할 생각을 못했어요. 황명수 전 총동창회장(전 국회국방위원장·작고)도 부산으로 옮겨온 우리 대학을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휴전이 되고, 서울로 환도하자 그는 을지로 입구 반도호텔에 있던 미국무역주식회사에 입사해 회사원으로 근무했다. 이때 복학해 19614학년 1학기를 마쳤는데 졸업 한 학기를 앞두고 운명적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났다. 그리고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대학 다니면서 추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나요.

    당시 우리 대학에는 학계의 석학들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경제원론을 강의했던 신태환 박사를 비롯해 양주동박사, 최호진, 고병익 박사 등이 계셨습니다. 학계의 권위자가 동국대에 포진했던 것은 월급이 서울대학이나 연·고대에 비해 서너 배 많았기 때문입니다. 신태환 교수에게 경제원론을 배웠는데, 과목이 좀 어렵다고 말하자 경제원론을 제대로 알려면 수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방정식, 시그마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재미를 못 붙이고, 대신 자신있는 영문과 강의를 많이 들었습니다. 국문과 양주동 박사 강의도 들었고요. 당시는 서울대 연·고대 학생들이 수업 들으러 동국대를 많이 찾아왔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도 서울대학과 연·고대를 찾아갔고요. 그때는 이렇게 대학간에 교류가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에피소드도 전했다.

     

    과는 다르나 정치과 1년 선배로 정재철 전 장관(전 총동회장·작고)이 있습니다. 부잣집 아들로 멋쟁이였지요. 당시 학생들은 미군부대 군복을 물들여서 입고 다니는데 정 선배는 모직인 새루 양복을 입고 다녀요. 다소 설치고 다녔지만 그게 멋있어서 많이 따랐지요. 친구 중에 정치과의 권오봉과 송정섭 1년 선배가 있었어요. ‘마고다란 별명의 송정섭 선배는 반탁(신탁통치반대) 동국대위원장이었죠. 함평 출신인 권오봉은 미남에 덩치가 좋은 학생으로 리더십이 있었어요. 그런데 둘이 서로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일로 다투게 되었어요. 필동 학교 교정 뒷산에 올라 한판 붙는다는데, 권오봉이 칼을 들고 왔어요. 그래서 내가 단박에 칼을 빼앗고, 여기서 더 이상 싸우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호통을 쳤지요. 싸움은 중단되고 결국 화해했어요. 그들은 내 주먹 상대가 안 됩니다. 그러니 내 말을 안들을 수 없지요.”

    권 이사장은 목포상업학교 재학 시절 권투선수였다. 참기름공장을 운영하는 부잣집의 외아들로서 야구, 농구, 유도 등 만능선수로 뛰다가 복싱도 했는데, 전국선수권대회에 나가 우승한 기록도 있다. 몸집이 장골(키가 1m73쯤 되는 당시로서는 장신)인데다 펀치력도 좋아서 그와 시선이 부딪치면 상대방이 저절로 쫄아서 슬슬 자리를 피해버린다. 오늘날 그의 건강 비법이 이런 만능선수 관록 때문으로도 보인다.

     

    권 이사장은 입담도 좋아서 끝없이 대화가 이어져 실례인 줄 알면서도 시간 관계상 중간에 발언을 막는 일도 잦아졌다. 그래도 불쾌해하시지 않았다.

     

    -다른 일화들은 무엇이 있습니까.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 때 엄청난 핍박을 받고, 죽을 고비도 넘겼지만, 실은 대학 재학시절에도 두 번의 죽을 고비가 있었어요.”

    대학 2년 때 6.25가 터졌는데, 외무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학교 도서관을 찾다보니 미처 피난을 가지 못했다. 북한 인민군이 필동 캠퍼스에 들이닥쳐서 학생들을 조선의용군으로 차출해 보냈다. 그도 트럭에 실려 가던 도중 지금 가면 개죽음이다하고 잽싸게 차에서 뛰어내려 몸을 피했다. 운동신경이 발달해 민첩한 행동으로 골목으로 숨어들어 살아났다. 나중엔 국군에서도 의용군을 차출해갔는데, 결국 동창생들이 남북 학생의용군으로 갈려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이 연출되었다.

     

    권 이사장은 적 치하를 피해 195082일 나룻배로 한강을 도강해 15일 동안 걸어서 목포에 도착했다. 그런데 목포상업학교 동창생들이 빨치산으로 입산하자고 강권해 끌려가게 되었다. 이때 한 친구가 너는 독자니까 집에 남으라고 제외시켜 입산을 모면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독자라는 것이 친구들로부터 동정을 받은 것이다. 그때 입산했더라면 운명이 바뀌었을지 모른다. 그는 며칠 후 배를 타고 부산으로 튀어 미군기지사령부 통역관이 되었다.

     

    -정치에 입문하시게 된 동기를 소개해주십시오.

    김대중 대통령과의 인연 때문이죠. DJ는 나의 목포북교국민학교, 목포상업학교 4년 선배입니다. 내가 목상 1학년 입학하니까 그는 5학년이었습니다. 당시 DJ의 명성은 대단했지요. 잘 생긴 얼굴에 목포북교 1등 졸업에다, 목포상업학교 1등 합격, 1등 졸업이었으니까요. 거기에 청중을 사로잡는 웅변술이 뛰어났으니 우리들의 우상이었어요. 1961년 장면 정권 시절,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 또 출마한다고 해요. 목포에서 한번, 인제에서 두 번 낙선했으니 안타까워서 돕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교사직을 그만두고 인제에 올라가서 수행원 겸 운동원으로 활동했지요.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당선이 됐는데, 당선증을 받은 3일 만에 5.16군사 쿠데타가 났어요. 국회의원 선서도 못하고 장면 박사와 함께 쿠데타 세력으로 몰려 구속되었지요. 풀려나긴 했으나 DJ는 정치규제법에 묶여 2년 동안 활동할 수 없게 되었지요. 이런 그를 외면하고 떠날 수가 없었지요.”

    6대 국회의원 선거(1963.11)가 다가왔다. 규제가 풀린 DJ는 인제를 포기하고 서울 마포구에서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권 이사장이 형님, 목포로 갑시다하고 목포 출마를 권유했다. DJ는 낙선한 고향인지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목포 여론이 전과 다르다는 것을 전달한 뒤 목포에 출마토록 해 천신만고 끝에 당선됐다. ‘천신만고라고 말한 것은 박정희가 DJ만은 반드시 낙선시키라고 특명을 내려 방해했기 때문이다. 처절한 시투 끝에 당선된 것이 오늘날 ‘DJ와 권노갑정치 인생의 시발점이었다.

     

    그 다음 기나긴 고난의 시절들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다. 박정희 유신정권 때와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때, 고문을 포함하여 감방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다. 그중 1972유신 투쟁 때.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했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 5.18 광주민주화항쟁 때 DJ와 함께 끌려갔을 때도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팬티까지 벗기고 인간적 수치심과 모멸감을 줄 때 인간의 잔인성이 어디까지인가, 한없는 절망을 느꼈다.


    -그들이 고문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겁을 주는 것이지요. 어떤 구체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한전 등 국영기업체 임원직을 주겠다, 등으로 회유를 하는데 변절하지 않겠다고 거부하면 예외 없이 고문을 가하는 것이지요. 돈도 삼천만 원(요즘 시세로 수십억 원) 주고, 미국 유학도 할 수 있게 하겠으니 협력하라는 것인데, 듣지 않으면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악행을 저질러요. 다음으로 ‘DJ의 여자관계를 밝혀라’, ‘정치자금을 댄 자가 누구냐’, ‘가깝게 지내는 군부 인맥을 대라는 것이지요. 불륜이 있다면 정치적으로 매장하려는 것이고, 정치자금을 추궁하는 것은 돈을 댄 사람의 회사를 망가뜨릴 작정으로 본 떼를 보이겠다는 것이고, 군부 인맥 대라는 것은 쿠데타를 일으킬까, 지레 겁을 먹고 뒤를 캐면서 위협하는 것이지요. 불륜이 없고, 정치자금을 댄 기업인이 없고, 가깝게 지내는 군부 인사가 없으니 당연히 없다고 하는데, 거짓말한다고 고문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야만과 광기의 시절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버텼다. 그리고 비폭력 평화시위를 주도하면서 민주화투쟁국민회의, 김대중, 김영삼 두 지도자가 이끄는 민주화추진협의회에 동참해서 마침내 87민주항쟁과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1997년 우리 헌정사상 50년 만에 첫 민주적,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다.

     

    -그중 보람 있었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당연히 97대선에 승리했을 때지요. 김대중이라는 정치 거목을 당선시키자 그동안 당했던 모든 수난과 고통들이 말끔히 씻겨나간 기분이었어요.”

    그러나 권 이사장은 대선 승리의 영광을 제대로 맛보지 못했다. 97대선 과정 중 어떤 공직도 맡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김대중 정부에서 어떤 임명직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속을 지킨 것이다.

     

    권 이사장은 뒤늦게 국회의원에 출마해 재선한 데 이어 전국구 의원을 지낸 3선으로서 2000년 새천년민주당 지명직 최고위원이 되었다. 그런데 200110월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주재하는 민주당 최고회의에서 정동영 최고위원이 권노갑 최고위원은 항간에 널리 알려져 있는 부통령이라고 소문나있다. 김영삼 대통령 아들 김현철과 같은 제2의 현철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물러나야 한다고 대통령 앞에서 매도하는 발언을 했다. 이때 그는 군말없이 최고위원직을 사퇴했다. 물러날 필요도 없고, 다음 비례대표 의원직을 받을 수 있는데도 오직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깨끗이 물러난 것이다.

     

    권 이사장은 한때 비자금 문제로 옥고까지 치렀다. 그는 DJ를 대신해 조직과 자금을 관리했으며, 동교동계 최고 실세로 활동한 당사자로서 DJ집권기 당··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런 것이 결과적으로 족쇄가 되었다.

     

    나는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온갖 탄압과 역경을 이기고 김대중 총재가 대통령이 된 것 하나로 나 역시 다 이룬 것이오.”

     

    -그렇다면 김대중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답변은 여러 가지 있었지만, 미진했던지 별도로 이메일 답변을 보내주었다. 성의가 대단해서 그대로 옮긴다).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민주주의, 인권, 평화에 대한 투철한 정치철학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 분을 모셨다는 것이 긍지이자 자부심입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참여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부르는 지방자치를 단식투쟁을 통해 실현시켰습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 제도와 의료·연금·고용·산재 등 4대 사회보험을 모든 국민에게 실시하는 사회안전망을 구축했지요. 인권법을 제정하고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하고, 양성평등법을 제정하는 등 우리나라를 인권국가로 만들었습니다. IT 세계 최강국으로 발전시키고, 벤처육성을 통해 청년들의 꿈을 실현시키고, 우리 경제를 과학기술경제로 도약시켰습니다. 또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 문화정책으로 문화산업과 한류문화가 세계에 파도치게 했습니다. 이런 정책들을 통해 국가부도사태에 직면한 IMF 외환위기를 3년 반 만에 극복하고 우리나라를 세계 10위권 경제선진국으로 발전시켰습니다. 화해와 협력의 햇볕정책으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치보복을 일체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과도 불행했던 과거를 넘어 미래 파트너십으로 나아가는 화해의 정책을 펼쳤습니다. 스웨덴 노벨평화상위원회는 김대중대통령의 이런 업적을 평가해서 2000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여했지요. 나는 이런 김대중 대통령을 평생 모시고 정치한 것이 자랑스럽고 보람 있는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DJ의 위대한 점은 무엇보다 용서와 화해의 정신으로 자신을 탄압했고 죽이려 했던 모든 정적들을 용서했다는 점을 들었다. 그것이 DJ정신이라는 것이다. 권 이사장 역시 그를 고문했던 고문기술자들을 다 용서했다고 한다. 그중에는 일찍 죽은 사람도 있고, 숨어 사는 사람도 있는데 모두 연민을 느낀다고 했다. 권 이사장은 그를 가혹하게 탄압했던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부회장을 1999년에 맡았다고 추후 전화로 알려왔다. 간디의 말대로 약한 자는 절대로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지만, 용서는 강한 자의 특권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요즈음 정치를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정치철학이 없는 정치인들 때문에 얼마나 국가가 혼란스럽고, 국민이 불행해지는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오는 3월 대선을 앞두고 여야 대선 후보에게서 정치철학을 보지 못해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정쟁만 있고, 정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철학을 교훈 삼아야 한다고, 별도의 답변을 보내왔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훌륭한 정치철학을 가진 대통령이었다고 세계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자신의 정치철학을 이렇게 말씀했다. “나는 정치를 하는 사람으로서 정치철학, 정치 신조를 가지고 있는데, 위대한 정치지도자는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권력을 잡고 있느냐, 얼마나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느냐, 그리고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남겼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세로 국민을 대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자기 국민을 존경하고 사랑했느냐, 국민에게 행복이 되고 이득이 되는 올바른 방향과 정책들을 제시해 실현시켰느냐에 있다. 그리고 그런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가, 어느 정도로 충실하게 진심으로 국민을 대했으며 봉사했는가가 중요하다. 나에게 있어서 유일한 영웅은 국민이다. 국민은 양심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나는 국민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정치의 기본 이념과 신조로 삼아왔다. 나는 국민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거나, 국민에게 자비심을 베푸는 것과 같은 정치 자세를 경멸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권 이사장은 자신의 정치철학이 DJ 정치철학과 일치한다고 했다. 철저하게 ‘DJ의 신봉자임을 보여준다. 한 주군을 위해 이렇게 헌신하는 인물도 있나 하는 외경감이 들 정도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정치인은 역사관과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이 중요해요. 그리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를 해야 해요. 민주적 결정권과 인권, 행복 추구의 권리를 보장해야 합니다. 정치인의 존재 이유와 목표는 모든 국민이 평등하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지요.”

     

    -좌우명은 어떤 것입니까.

    정직, 겸손, 올바른 생활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이메일 답변을 해왔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 좌우명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마음을 열고 그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을 가볍게 대하거나 건성으로 대하면 안 되지요. 대다수의 정치인들은 필요할 때만 진지한 척하기 때문에 실패를 합니다. 군자는 화이부동해야 합니다.”

     

    -총동창회장 재임 시 운영 방침이 무엇이었나요.

    나는 경선 없이 총동창회장에 추대되었습니다. 회장 추대가 이견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화합이 잘 이루어졌습니다. 재단이사장, 총장, 그리고 총동창회장인 나 3자가 한 자리에 자주 만나 일류 동대를 만들자고 약속했지요. 후배들의 취직 문제, 직장 내에서의 동문 승진 문제 등에 신경을 썼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고 묻자 검사장 승진 등이 있으나 일일이 답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사양했다.

     

    -총동창회에 바라신 점이 있다면?

    동창회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갈등상이 보인다면 동창들의 동참이 제한적이지요. 나이 든 선배들은 물론 젊은 후배들의 참여가 약한데 어디에 원인이 있느냐를 살펴보세요. 모교 발전의 3대 축의 하나가 총동창회인데, 힘을 응축시켜야 해요.”

    한때 동창회 갈등 상황을 지적하시는 것 같다. 이에 대해 박대신 총동창회장이 이연택 전 회장 등을 가까운 시일 내 만나기로 했다며 화해와 통합의 정신을 살리겠다고 화답했다.

     

    -모교에 바라신 점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모교는 우리가 대학 다니던 때처럼 좋은 교수진을 확보해야 합니다. 교수진이 좋으면 우수 학생들이 몰려들어요. 좋은 교수 모셔오는 데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권 이사장은 19492월에 경제과에 입학, 졸업은 1997년 복학해 마지막 2학기 수업을 마치고 졸업했다. 40여년만의 일이다. 그후 한국외대에서 석사학위(영어영문학)를 받고, 지금은 모교에서 영문학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지도교수가 김애주 영문과 교수이자 대외협력처장이다.

     

    권 이사장은 경주캠퍼스 입구의 경주대교 건설에 경상북도에 예산을 배정해 지원한 일 등 모교를 위해 봉사한 일도 많다.

     

    -건강 비결이 무엇입니까.

    긍정적 마인드죠. 그리고 매일 스포츠센터에 가고, 1주일에 한두 번 필드에 나갑니다. 청소년시절부터 단련된 몸이 지금까지 잘 유지된 것 같습니다.”

     

    어느 자료에 권 이사장은 담배를 평생 피지 않은 것으로 나와 있다. 같은 동교동계 중진이자 골초였던 박상천 전 원내총무(작고)와 흡연 문제로 설전을 벌였다는 일화도 있다. 평생 과음해본 적도 없다.

     

    부인 박현숙 여사와의 사이에 11남을 두었다. 주부인 맏딸 수연(52)씨는 조지워싱턴대, 뉴욕대학원, 동국대학교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아들 정민(51)씨는 미국 시애틀의 University of washington 졸업 후 GE 상무로 근무하고 있다.

     

    이 계 홍<65국문학과·총동창회보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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